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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이야기/습작(my story) (25)
사람과 사람사이(사사사)
어떤 장소를 갈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떠오르는 장면도 있다. 잊혀지지 않는 향기도 있다. 그런 곳들은 대부분 수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모처럼 우리 아이들과 졸업사진촬영으로 어린이대공원을 다녀왔다. 우리학교는 해마다 졸업사진 촬영을 어린이대공원에서 하곤 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2년간은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교내 사진촬영만 있었지만 드디어 올해에는 아이들에게 추억이 될 졸업사진촬영을 외부에서 할 수 있게되었다. 나 역시 2018년과 2019년에 다녀왔었는데 올해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린이대공원은 나에게 추억이 많은 곳이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을 왔다가 길을 잃어 울면서 헤매이다 혼자 버스를 타고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지만 선생님께는 개인행동했다며 혼도 나고 종아리도 맞은 기억이 있다. ..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매스컴을 통해 연말이면 듣던 '다사다난했던'이란 말도 요새는 예전만큼 듣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구세군 자선 냄비의 종소리도, 12월 마지막 날의 보신각 종소리도, 송구영신 예배 참석도 이제는 연말 분위기를 느끼는 핵심어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방송국마다 가요대상을 비롯하여 연기대상과 연예대상 등 수많은 시상식을 보면서 그 해의 유행을 알 수 있었지요. 나의 예상과 방송국에서의 수상자와 얼마나 유사한지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시상식 프로그램들을 보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인기도 많이 떨어진듯합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게된것도 이유이겠지요.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11..
C는 나와 27년 지기이다. 6학년 때 전학을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첫 모습은 이랬다. 덩치가 컸고 키도 나보다 10cm 이상 차이가 났다. 피부는 알비니즘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하여 온몸이 하얗고 털까지 백색이었다. 늘 모자를 쓰고 다녔고 안경도 쓰고 다녔다. 우리는 맹학교를 다녔다. 그는 일반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을 왔는데 일반학교에서는 가장 안 보이던 친구가 이곳에서는 가장 잘 보이는 학생이었다. 나도 전혀 안 보이는 친구들에 비해서는 조금 봤는데 나는 글씨도 못 보고 사람 얼굴도 잘 분간 못하던 거에 비하면 C는 가까이에서는 글도 다 읽고 사람 얼굴도 거의 구분을 하였다. 그와 나는 27년간 늘 가깝게 지냈다. 나는 사람과 빨리 친해지지 못하던거에 비하여 주위에 늘 친구가 많았다. 다른 한편..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답십리이다. 4살 때 남양주 마석으로 이사를 갔으니 답십리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3살 때 길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나의 기억이 아닌 들은 이야기이다. 마석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국민학교를 입학했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힘들다며 1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퇴하게 된다.. 이듬해에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고 고등학교까지 이 곳에서 기숙생활을 하며 지내게 된다. 나에게는 부모님이 계신 남양주 마석이 고향이다 시 피하면서도 종로에 있는 맹학교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 시절 경복궁과 국립중앙박물관을 자주 갔었다. 당시 그 곳에는 외국인도 많이 왔었다. 그들의 이질적인 언어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들 특유의 냄새도 신기했다. 나의 고향은 ..
비가 내리는 날은 참 운치 있다.. 비 소리만 들어도 차분해짐을 느끼기도 하다. 비 오는 날에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싶다는 상상도 종종 한다. 언젠가 비 오는 날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그 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자세히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눈 그 분위기는 애틋하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장마철이었던가! 쏟아붓는 비를 맞고 싶어서 우산을 쓰지 않고 한바탕 비를 맞고 들어온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개운함을 느꼈던것 같다. 나에게 비는 그렇게 우울한 단어는 아니다. 조금 차분해질 뿐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어서 좋기도하다. 김치전도 생각나고, 막걸리도 생각난다. 매콤한 닭발이나 이와 유사한..
2월 중순부터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매 주 기타를 배우게되었다. 나에게 기타란 언젠가 잘 치고 싶은 악기이며, 멋지게 공연도 해보는 게 꿈이다. 지금까지 기타 레슨은 많이 받아봤다. 대학교 때부터 몇 번인지 거의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이 배우러 다녀봤지만 실력은 엉망이다. 대학교 때에는 클래식 기타 학원을 가서 배웠는데 너무 어려워서 2달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교사가 된 후에도 아이들과 함께 수업시간에 동기유발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면 좋아할 것 같아서 실용음악학원을 등록하여 기타를 배우러 다녔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찾다가 수락산 역 근처로 다녔었는데 여기서도 얼마를 다니지 못하고 포기를 했다. 왜 포기를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가 않는다. 짐작하건대 당시 나는 마석에서 출퇴근..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6살에 장애판정을 받았고 지금 내 나이가 40살이니 장애 경력 35년 차인 셈이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보면 부담을 갖고 어떤 말을 걸어야 할지 너무나도 조심하곤 한다. 장애인과 마주하면서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망설이기도 한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 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불러도 된다. 배려하고 존중해준다는 명목 하에 장애우라는 용어는 삼가는 게 좋다. 처음 본 사람에게 우리는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지 않은가? 그냥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시각장애인, 듣지 못하는 사람은 청각장애인,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지체장애인이라고 부르면 된다. 용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호칭이 가장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가..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말이다. 어린시절 친구들의 생일은 늘 양력이라 부러워했었다. 잊혀지지도 않고 기억하기도 쉬워서였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의 연세는 친구들의 부모님에 비하여 평균적으로 10살이상 많은편이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세대에서는 주민등록에 올리시기를 대체로 음력으로 올리셨기에 우리 형제들의 출생신고도 음력으로 하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삼형제 중에 나만 주민등록에 정확히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음력생일을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스무살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나의 생일을 굳이 양력으로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내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정말 친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인것도 같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부모님이 정해주신것인데 내가 억지로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