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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습작(my story)

연애 후 7년 째

C드레곤 2020. 10. 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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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3일

우리 부부 이야기

 

우리 가족

2016년도 625일에 우리는 결혼을 하였다.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새하얀 스케치북에 한 장 한 장 그리고 색칠하며 어느새 만 4년이 흘렀고 달로는 50개월이 지났다. 이 스케치북 속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으며, 다툼도 있고 따뜻함도 칠해져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여름, 시각장애인 교사 모임에서였다. 나는 서울의 어느 특수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북 남원에 지적장애 특수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선 서로의 이름과 그녀가 전맹이라는 것 정도만 아는 수준으로 호감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듬해에 시각장애인 교사 모임에서 신규교사와 경력 있는 교사와의 멘토링 매칭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멘티랑 멘토로 만난 그녀와 얘기를 나눠보니 그녀의 부모님은 청주에 사셨고, 남원에서의 학교생활은 즐거움도 있었겠지만 외로움도 많았던 것 같았다. 학교에서의 어려움과 속상함을 나에게 전화하며 풀거나 위로를 받으며 우리는 가까워져 갔다. 그러다가 내가 서울 오면 밥 사주겠다고 하니 그녀는 망설임 없이 조만간 가겠다고 하였다. 날이 좋았던 주말, 우리는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지금은 없어진 베니건스를 가게 되었다. 사실 난 양식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남들이 가자면 가는 정도였지만 양식을 좋아하는 그녀의 선택을 따랐다. 베니건스에서 우리는 스파게티를 비롯하여 몇 가지 메뉴를 주문하였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밥을 예쁘게 잘 먹었다. 식사하고 차를 한잔한 후 우리는 청계천을 걸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서울역에서 오송 가는 기차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갔다. 이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멘토링이라는 명목 하에 몇 달간 지속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러한 만남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녀와 이렇게 지내야 할까?

고백하고 사귀자고 하여야 할까?

사귀지도 않으면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고민의 끝은 고백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해 개천절 우리는 여느 때처럼 식사하고 청계천을 걸었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말을 할까 말까 마음을 졸이며 혼자 두근두근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초저녁의 바람은 선선하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다가 우리는 어느 계단 앞에 앉게 되었고 청계천을 바라보며 난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혜진아 우리 사귀자. 고민 많이 했어. 나랑 사귈래?”

나의 고백에 답한 그녀의 말이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레는 목소리와 행복해하는 모습은 아직 기억에 선하다. 아마도

네 좋아요. 고마워요. 우리 앞으로 예쁘게 사귀어요. 나도 잘해줄게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난 그녀를 안아주었고 첫 입맞춤 그 자리에서 하였다.

그 후 결혼까지는 생각보다 수월하였다. 둘 다 방학이 있는 직업이라 그녀는 방학마다 서울에 와서 지내곤 했다. 그녀가 배우고 싶었던 여러 연수들이 서울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방학마다 고시원도 찾아주고 원룸도 구하러 함께 다녔다. 그렇게 방학이 3번 정도 지났고 방학 때마다 빈방을 구해주는 게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게 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2016년도 1월부터 우리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하여 양가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2월 말에는 양가 상견례도 하였다. 우여곡절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순탄하게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예식장을 잡고 청첩장을 만들며, 신혼집을 알아보았다. 신혼여행지는 그녀에게 모두 맡겼다. 역시 꼼꼼한 그녀이기에 알뜰하게 좋은 여행사를 찾았고 예쁜 추억을 푸껫에서 담아왔다.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우리는 서로의 직장이 너무나도 멀어서 주말부부를 해야 했다. 주말마다 만나는 게 아쉬워 우리는 결혼을 한 것인데 결혼을 해서도 여전히 주말에만 만나고 있었다. 아쉬움은 많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애틋하고 서로를 더 생각해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시간은 조금씩 흘렀고 결혼한 지 4개월 차 정도에 그녀의 몸에 변화가 있었다. 혹시 하는 맘으로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그날은 한글날이었고 그녀의 학교는 재량휴업일이었다. 나는 학교 출근을 했다가 퇴근한 후 만났고 용산역으로 바래다주며 물었다.

병원에서 뭐래? ”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나는 직감했다. 임신이구나!

임신이래?”라고 물으며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걱정도 되었고 떨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마음은 숨기었다.

, 임신이래.”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바로 기뻐하며 너무 좋다고 안아주었다.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은 있었기에 임신한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더 행복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 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떨리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내일이 힘들겠지만 고맙고 오늘 함께할 수 없다는 미안한 마음에 기차를 타고 남원을 데려다주고 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내가 다녀오면 고맙고 좋지만 내가 너무 피곤할 텐데 하며 미안해하기도 하였다.

주말부부인 우리는 그렇게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부모가 될 준비를 하였다. 우리 아기의 태명은 ''이었다. 조금 창피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카페가 스타벅스였고 우리의 기대 성별이 여아이기도 하여서였다. 난생처음 가는 산부인과 정기 검진도 조금 지루하기는 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고민이 하나 더 생겼다. 나의 시각장애 원인은 원인불명의 시신경 위축이고, 그녀의 장애 원인은 녹내장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의 아기가 엄마 아빠처럼 눈이 안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의사 선생님께도 자주 묻곤 하였다.

2017610일 새벽 140,

우리는 이날을 잊지 못한다.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하나뿐인 우리의 보물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정일보다는 약 5 일정도 뒤에 태어났고 그녀와 나는 이날 밖에서 감자탕을 사서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디카페인으로 한 잔 마시고 중랑천을 걷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진통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고 하였다. 나는 주위의 출산 선배 여선생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답변은 얼른 가보라 하였고 동네 친한 선생님께 부탁하여 우리는 충무로까지 그 선생님의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된다.

병원 도착시간은 11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12시경 의사 선생님은 이미 자궁문이 8cm나 열렸다며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하였다. 나는 급히 입원 수속을 진행함과 동시에 그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최대한 소독하고 비닐장갑을 끼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진통이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140분 태어난 아기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녀는 무통 주사도 맞지 않은 채 자랑스럽고 예쁜 우리 아들을 낳았고 난 아직도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았고 아기를 안아보고 탯줄도 자른 후 나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 부모님과 처가에 새벽이긴 했지만, 이 소식을 전하였다.

하지만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생각만큼 기뻐하지 않으셨다. 안 보이는 사람 둘이 아기를 어떻게 키울 것이며 시각장애가 있는 아기가 태어나면 어쩔 거냐고 하셨다. 사실 우리도 걱정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축하해주시고 기뻐하셨으면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속상했다. 그래도 지금은 우리 아기를 어느 누구보다도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주신다.

4살인 우리 아기의 이름은 최지한이다. 말도 아주 많이 잘한다. 어린이집 친구 중 말도 거의 제일 잘하는 편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소근육 기능도 좋아서 쉽게 블록을 맞추고 눈썰미가 좋아서 누구보다 먼저 바뀐 상황을 알아차린다. 요즘은 엄마 아빠가 잘 안 보이는 것을 알아서인지 뭘 찾으려 하면,

내가 찾아올게!”라고 하면서 금세 찾아오곤 한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점프 점프하며 에너지를 쏟는 것도 좋아한다. 요새는 장난감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 편식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골고루 잘 먹는 편이다. 책도 좋아하여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어준다. 우리는 책에 점자를 붙여서 읽어주는 편인데 기억하고 싶은 책들은 외울 때까지 읽어달라고 한다. 가끔은 자기 전에 책을 너무 많이 가져와서 엄마와 아빠가 곤란해할 때도 종종 있다. 우리는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최대한 우리 아기에게 많은 경험을 해주려 한다. 가능하면 주말마다 공원이라도 가고 소풍도 가고, 동물원도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지한이는 어린이집을 가지 않는 날은,

오늘은 우리 어디 가는 날이야?”라고 묻곤 한다.

우리가 가장 고마워하는 부분은 눈이 건강한 것이다. 사실 아기를 키우면서 아내와 갈등이 참 많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가정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나와의 마찰과 갈등이 그녀의 장애도 한몫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기가 커가면서 그리고 그녀가 복직하면서 갈등과 마찰은 많이 줄었다.

여기서 기쁜 소식!!!

아내는 2년 반을 육아휴직을 하면서 전북에서 서울로 교류 신청을 계속해왔다. 작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청을 했는데 두구두구두구두구!!

서울로 시도 간 교류가 성공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가 아기를 낳은 후 가장 기뻐한 일이 아닌가 싶다. 현재 나는 고등학교 특수학급에서 특수교사로, 아내는 중학교 특수학급에서 특수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때때로 힘들지만 아내가 있어서 행복하고 아기가 있어서 즐겁다. 코로나19코로나 19로 많이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만 있는 경우가 많지만 앞으로 더 많은 추억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와 7살이나 차이 나는 그녀, 예쁘고 사랑스럽고 챙겨주고 싶은 그녀, 똑 부러지고 냉철한 그녀와 지금은 39개월 된 미운 4살 아들과 함께 남은 스케치북을 행복하게 채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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